또 다른 아빠가 되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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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여의고 시작된 아버지의 학대와 어려운 형편으로 인해

시설에서 살던 당시 저는 그저 16살의 평범한 가정을 그리던 한 아이였습니다. 정해진 시간이 아니면 밥을 주지 않던, 가끔은 빵과 우유만 주던 시설을 나와 동생과 떨어진 다른 시설로 옮겨진 후 한없이 불안정했던 저는 유일한 분출구였던 학업에 더 기를 쓰고 매달리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고등학교는 의무 교육이 아니기에 교복이나 교재 등에 국가 지원금이 지원되지 않는데다 나이가 있어서 후원자를 찾기도 힘들다는 시설장의 말에 부질없는 희망이라 울음을 삼키던 때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의무 교육 기간 동안 만큼은 학교의 그리고 교육 정책의 여러 이점들을 통해 학원이나 과외는 꿈꿀 수 없었어도 교과서로, 교사용 문제집으로 마음만 독하게 먹는다면 얼마든지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가적 지원이 두루 미치지 못하는 고교 진학 과정은 제게 있어 학업의 단절을 뜻하는 절망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공장 또는 경제 활동이 가능한 대안 학교를 알아보던 제게 ‘초, 중학교 성적이 우수하고 대외 실적이 다양한 잠재적인 역량을 지닌 학생이니 우리 학교로 입학할 수 있도록 지도해 달라.’ 라고

도움의 손길을 건네주신 분이 바로 ‘박성수’ 선생님이셨습니다.

선생님의 도움으로 공장이 아닌, 바라 마지않던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일반계 평범한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였지만 무엇보다 학교 교육 혜택에 따라 3년 내내 입학 당시의 성적(전교 3등)을 유지한다면 기숙사 생활비를 비롯한 학비를 지원하고 더하여 소정의 학업 장려 장학금을 준다는 소식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감사한 일이였습니다.

이렇게 학업을 이을 수 있게 되면서 드디어 마음 놓고 울 수 있었고 배우고 싶었고 평범하고 싶었던 16살의 저는 웃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공허, 아버지의 학대, 시설에서의 악몽으로 인해 매일을 모서리의 모서리까지 치이던 저를 발견하고 가시밭이 아닌 양지로 이끌어 주신 분이 바로 ‘박성수’ 선생님이셨습니다. ‘자상한 아빠는 이런 사람일까’ 를 늘 느낄 수 있게 해 주셨던 선생님이 계셨기에 지금의 ‘저’에 가까운 그 때의 ‘나’가 있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다른 아이들과 저를 다른 잣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불쌍하다는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렇게까지 노력한 네가 자랑스럽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데 너는 정말 잊지 못할 제자다.’, ‘이렇게 잘 커줘서 정말 대견하다’ 등의 말씀을 해 주셨기에 저는 하루하루를 힘내어 살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에도 체육 시간에 다치고 온 날은 반창고를 주시고 모의고사 성적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을 때면 책상 서랍에 모아둔 초코 과자를 잔뜩 주시는 저에겐 또 한 분의 ‘아빠’입니다.

그리고 가정 형편으로 인해 몇 번이나 학업과 생계 사이를 고민하던 제게 매번, 너는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셨던 분이자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던 노력을 격려해 주고 그로인해 서울에서 큰 상을 타게 되었을 때 바쁜 일을 미루고 서울까지 스승이자 보호자로서 동행해주신 제게 있어 3년 동안의 매 빛나는 순간들을 함께 해 주셨던 감사한 ‘선생님’ 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언제나 남에게 말 못할 가족들의 일로 인해 우울해할 때면 말없이 바나나를 선물해 주셨던, 별일 없이도 늘 안부 인사를 물어주시던, 아직까지도 아프지는 않는지 밥은 챙겨먹고 다니는지 잘 살고 있는지를 살펴 주시는 감사한 ‘어른’이십니다.

믿고 의자할 어른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제게 있어 아빠이자, 선생님이자, 어른으로써의 본을 보여주시고 아낌없는 사랑을 나누어 주신 기억들이 지금도 장애물을 만나고 곤경에 빠질 때면 막막해 하기 전에 차분히 기다리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귀한 촉매제가 되어 남아있습니다.


더하여 당시의 제게 있어 고등학교는 중학교와 달리 영어나 수학을 혼자의 힘으로만 공부하기에는 벅찬 감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해서 과일이나 간식, 안부 인사를 챙겨주는 부모님이 아니더라도 문제집 한 권, 족집게 과외 한 번 정도는 경험해 보고 싶다. 그럼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욕심에 한참 다른 아이들을 부러워하며 방황하곤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조차 일방적인 잣대가 아닌 진심으로 이해하며 이끌어 주신 선생님이 ‘박성수’ 선생님이셨습니다. 반 전체에 돌리는 간식이 부담스럽게 느껴져 포기한 학급 임원 활동을 추천해 주시고, 제가 가진 재능을 살려 여러 대회에 부담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동아리 활동들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생일이면 짧지만 편지와 격려의 말을 해주시면서 바람 앞의 등불 같던 제가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이기에 마음에만 담아두던 말을 이렇게 꺼내어 봅니다.




제가 ‘잘 자란’ 제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한 선생님의 관심과 사랑으로 인해 역경을 극복하고 ‘어른’ 이 되기 전의 가장 불완전하고 위태로웠던 고등학교 시기를, 그리고 학업을 마칠 수 있었던 수 많은 학생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언제나 가능하면 모든 아이들을 부를 때에 이름과 특징을 기억하고 불러주셨던 선생님, 급식소에서 식사를 하시는 매 시간마다 기도를 하신 후에 ‘남기지 말고! 다 먹고 가라!’ 라고 소리 치셨던 선생님, 교무실에 간식이나 과일이 생길 때면 어김없이 아이들을 불러다가 먹으라며 내어주시곤 하셨던 선생님,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학업을 중단할 위기의 학생에게는 문화 상품권이 너무 많아서 버리려다가 주신다며 울지도 못하게 거짓말을 하셨던, 변변찮은 짐 가방 하나 가지지 못한 한 아이에게 마트에서 학생들 줄 간식을 너무 많이 샀더니 따라온 증정품이라며 캐리어를 선물해 주시곤 하신 ‘학생’이자 ‘제자’ 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함함하게 여기던 선생님이시기에 그 모든 따뜻한 순간과 기억들이 사진을 찍듯 마음에 담겨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 한 가지만 더 말하자면, 정말 ‘배우고 싶은’ 어른이셨습니다.

주말이면 복지관이나 요양원 등지로 꾸준히 봉사를 다니셨고 그래서 항상 따르고 싶은 선생님으로 기억에 자리하는 분입니다.

늘 아이들에게 눈과 귀를 기울이는, 그래서 모든 아이들이 ‘성수짱’ 이라며 아빠뻘의 선생님을 병아리마냥 따르게 만든, 학교에서 문제아라며 혀를 내두르는 친구들 조차도 선생님 수업 시간만큼은 애를 쓰며 집중할 정도로 편견 없는, 봄날 햇살 같은 선생님이셨습니다.


다만, 부족한 제가 아직 넘치게 받은 사랑을 다 나누지 못한, 덜 자란 제가 이렇게 감히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