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삶을 살게 해주신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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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좋아하시던 벚꽃이 활짝 필 때면 더욱 뵙고 싶은 우리선생님.

지난주에는 선생님께서 근무하시던 오래된 학교 교정에 언 일년만에 찾아가봤어요.

선분홍색 진달래와 철쭉 등 봄꽃들이 그 옛날 저 어렸을 때처럼 여전히 청초하게 펴있더군요.

문득 그 교정에서 예전 추억을 떠올려 봤어요.


20여년전 중학교를 다니던 저에 별명은 ‘귀목자가리’였어요.

어렸을 때 모진 열병으로 한쪽 귀의 청력을 거의 잃었던 저는 남들이 하는 얘기가 먼 산의 산울림처럼 잘 들리지 않았고 자연히 주변 친구들이 “은혜는 귀목자가리래요~ 귓구녕이 막힌 귀목자가리~”라고 별명을 지어 놀려대기 일쑤였죠.

놀림받는 아이.

지금말로는 왕따가 되어버린 저에게는 남들에게 말 못할 더 큰 아픔이 있었기에 항상 고개 숙이고 혼자 노는 외로운 아이였어요.

초등학교 6학년때 엄마는 매일 술을 드시고 폭언과 구타를 일삼는 아빠의 주폭을 못 견디셔서 집을 나가셨던 거에요.

엄마도 없이 어린 동생을 돌봐야 했던 저는 제 한 몸 돌볼 여유도 시간도 없이 학교를 다녀오면 친구들과 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꾹 참고 집안 살림과 동생을 보살피며 지내야 했죠.

고물을 모아서 내다 파시는 일로 생계를 꾸려가시던 아버지는 엄마가 집을 나가시고 나서부터는 더욱 술에 의지하셨죠.

어떤날에는 너무 술을 많이 드셔서 늦은 밤 동네 아저씨들이 동네 어귀에 술에 취에 쓰러져 있는 아버지를 엎고 집에 오시는 경우가 있곤 했어요.

그렇게 자주 술에 취해 “야 너희들 다 나가 죽어삐라. 다 필요없다 아이가. 니 애미보고 당장 데려가 달라고 전화해라”라고 소리 지르시고 세간사리를 부수는 아버지 밑에서 동생과 저는 공포에 떨며 작은방에서 숨죽여 울기를 여러날 해야했죠.

그런 저에게 학교공부란 큰 의미가 없었어요.

그냥 아버지의 말씀처럼 “계집애는 그냥 중학교만 나오면 된다 아이가. 무신 놈에 계집이 공부는 공부야? 글만 읽고 쓸 줄 알면 된다”라고 하시며 작은 전등불 밑에서 학교 숙제라도 하려는 저에게 소리치며 윽박지르셨죠.




그러던 어느날 중학교 2학년때 새로 전근오신 여선생님인 문정숙 선생님이 담임선생님이 되셨어요.

친구들은 새학기라고 시골 장에서 부모님이 사주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새 가방과 새 학용품을 가지고 학교에 왔더군요.

전 그에 비해 아버지가 작년에 어디선가 가져오셔서 저에게 “야 은혜야. 이거 학교 가지고 다니는 가방인 모양인데 니가 써라.”라고 던져주신 보잘것없는 가방에 낡은 학용품을 가지고 교실에 앉아있는데 친구들과 비교가 되어서 그런지 왠지 마음이 무겁고 주늑이 들더군요.

더욱이 옷은 무릎을 덧대어 꿰맨 낡은 골댄바지에 단추도 하나가 떨어진 낡은 윗도리를 입고 있는 저에 모습이 제가 봐도 남루하고 볼품이 없더군요.

새학기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담임선생님께서 숙제 검사를 하시는데 저는 도저히 집안일과 밭일을 하다보니 숙제할 시간이 없어서 매번 숙제를 못해 갔고 그걸 보신 선생님은 “아니 은혜야. 넌 왜 또 숙제를 못해왔어? 그리고 교과서는 어디다 두고 왔어? 왜 책이 없어?”라고 물으시더군요.

저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인채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죠.

그러자 반친구들이 “선생님. 은혜는 귀목자가리라서 잘 못들어요. 그리고 제는 동생도 돌봐야 되서 숙제 못한답니더. 헤헤헤”라고 놀리는 말을 하더군요.

그 날 저는 숙제 안한 다른 아이들과 함께 회초리로 손바닥을 맞아야 했죠.

전 순간 코끝이 찡해지고 그 간 참았던 눈물이 왈칵 속눈썹을 뚫고 뜨겁게 쏟아져 나오더군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속으로는 ‘울지 말아야돼. 울면 바보야. 뚝 그쳐 은혜야’를 외쳤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 서럽게 터진 눈물은 결코 그쳐지지 않고 한없이 쏟아지더군요.


그 눈물은 선생님이 때리시는 매가 아파서 흐르는 눈물이 아니라 한발 비켜 디딜 공간 하나 없는 제 삶이 숨막히고 서러워서 나오는 서글픈 눈물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자 담임선생님은 방과 후 교무실로 저를 따로 부르시더니 “은혜야. 집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니? 아까 보니까 점심도 거르는거 같던데. 엄마가 도시락 안 싸주셨어?”라고 물으시더군요.

저는 선생님의 엄마에 대한 말씀에 슬픈 생각이 들어 고개를 숙이고 아무말도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어요.

그러자 선생님이 “그래. 알았다. 조만간 가정방문이 있을 예정이니까. 그때 집에 부모님 찾아뵙고 우리 은혜에 대해서 자세한 얘길 들어봐야겠구나. 아참 그리고 육성회비가 몇 달째 밀렸더구나. 부모님께 말씀드리렴 알았지?”라고 하시며 그 날 상담을 마쳤어요.

그리고 몇주일뒤 정말 선생님은 저희집에 가정방문을 하시기 위해 찾아 오셨어요.


동네에서도 가장 산쪽으로 치우쳐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낡은 쓰레트집을 물어가면서 한참만에 찾아오신 담임선생님은 “아이구 은혜야. 참 집이 높은 곳에 있구나. 날씨가 참 덥네. 그래도 전망은 참 좋구나”라고 하시며 이 높은 곳까지 찾아오신 선생님께 죄송해 하는 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더군요.

마당에 있는 조그만 평상마루에 앉으신 선생님은 제가 내드린 차가운 냉수를 조금 드시고는 “집에 부모님 안계시니?”라고 물으시더군요.

잠시후 인기척에 잠이 깨신 아버지는 어제밤에도 술을 너무 드셔서 늦잠을 주무신터라 기분이 무척 안 좋아 보이셨어요.

하지만 딸아이의 담임선생님이 오셨다고 하니 당황하셨는지 주섬주섬 옷을 걸치시고 마루로 나오시더군요.

“아이구 슨상님요. 누추한 여그까지 어인일로 오셨슴니꺼?”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고 선생님도 “안녕하세요. 은혜 담임 선생님인 문정숙 이라고 합니다”라고 인사를 하시더군요.

잠시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시던 아버지는 “다 필요없습니더. 지는 우리 은혜 이번에 졸업하믄 어디 공장이라도 확 취업시키려고 합니더.

여자애가 공부하믄 뭐 한단 말입니꺼?

글구 애 엄마도 없는데 저 애가 집안 살림에 신경써야지예. 어디 고등학교를 간단 말입니꺼? 우리집 형편에 택도 없는 소리라예”라고 짜증을 내시며 말씀하시더군요.

그 말을 들은 담임선생님은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신지 아버지 뒤에 숨은 듯이 조용히 눈치보며 앉아있는 저를 측은한 눈빛으로 한동안 쳐다보시더군요.


그 날 이후 선생님은 더 이상 제가 숙제를 해오지 못해도 교과서를 가져오지 못해도 꾸중하시지 않으셨어요.

그 대신 저를 교무실로 불러서 “은혜야. 여기 교과서와 참고서 받으렴. 이건 우리 은혜를 위해서 선생님이 주는 특별한 선물이란다.”라고 웃으며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어 선생님을 쳐다보았더니 선생님께서 “은혜야. 모든 사람에게는 태어날때부터 공부하고 배워서 자신의 꿈을 활짝 펼쳐나갈 권리가 있는거야. 우리 은혜도 공부하고 싶어하는 거 선생님도 잘 알아. 이제부터는 선생님이 도와줄테니까.

열심히 공부해보렴”라고 하시며 따뜻한 손길로 제 볼을 쓰다듬어 주시더군요.

전 순간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너무나 감사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 했지만 이젠 선생님 앞에선 절대 울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이 떠올라 입술을 꽉 깨물고 흐르는 눈물을 삼켰어요.

그 날 이후로 저는 학교수업이 끝나도 학교에 남아서 담임선생님이 가르쳐 주시는 수학, 국어 공부도 배우고 혼자 자습도 하면서 제 속에 남아있는 학구열을 불태우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6개월 정도가 지나니까 학교 성적도 수직 상승을 하더니 어느덧 전교에서도 손가락에 들어갈 정도로 실력이 향상되더군요.

저는 시내에 있는 여고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게 생겨서 담임선생님께 “선생님 저... 고등학교에 가고 싶은데예. 지도 갈수 있을까예?”라고 여쭈어 보았죠.

그러자 선생님이 “그럼 은혜야. 넌 잘 할 수 있단다. 내가 아버지께 말씀드려 볼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그라”라고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해주시더군요.


그리고 며칠 후 술에 잔뜩 취해 들어오신 아버지가 작은방에서 책을 보고 저를 “은혜야~ 너 안방으로 와 봐라”라고 부르시더군요.

저는 혼날까봐 잔뜩 주늑이 들어서 안방에 들어가 아버지 앞에 앉았더니 아버지께서 “오늘 니 담임 선생님한테 얘기 다 들었다.

니가 고등학교를 가고 싶다고 했다며? 니가 도데체 생각이 있는애가? 없는 애가? 니 동생도 엄마 없이 저래 집에 있는데 니만 니 공부하겠다고 고등학교에 가버리먼. 이 집안 꼴이 뭐가 되겠노? 너도 참 답답한 애다. 아무튼 고등학교는 절대 안된다.”라고 화를 내시면서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더는 못 참겠어서 “아부지 지는 꼭 공부가 하고 싶습니더. 저도 공부 열심히 해서 나중에 우리 선생님처럼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선생님이 꼭 되고 싶단 말입니더. 그러니까네 저 고등학교에 한번만 꼭 보내주이소 예?”라고 큰소리로 말대꾸를 하고 말았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화가 나셔서는 “너 이놈에 기집애가 버르장머리 없이 어디 아부지한테 말대답을 해쌌노? 너 이리와라. 이놈에 기집애 오늘 매 좀 맞아야겠다”라고 하시며 두리번 거리며 매를 찾으시더군요.


전 더 이상 아버지에게 매 맞는게 무섭고 싫어서 맨발로 집을 뛰쳐나와 십여분 거리인 담임선생님댁으로 정신없이 무작정 달려갔죠.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서 흙 묻은 맨발로 헐떡거리고 서있는 저를 본 담임선생님은 “어머나 은혜아니니? 여기는 어쩐일이야? 무슨 일 있었어?”라고 놀라시는 기색이 영역하셨지만 이내 어찌된 내용인지 들으시고는 “어여 방안으로 들어오렴 날씨도 추운데” 라고 하시더군요.

담임선생님은 따뜻한 온수를 끓이셔서 저를 씻을 수 있도록 해주시고 달걀말이에 흰쌀밥을 지어주시며 따뜻한 밥상으로 식사도 챙겨주시더군요.

여지껏 잊고 지내던 엄마 같은 선생님의 보살핌에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선생님이 마음 아파 하실까봐 고개를 푹 숙이고 밥만 먹었어요.

선생님은 “은혜야. 너무 걱정하지마라. 내가 내일 아버지께 찾아가서 잘 말씀드릴께. 사람은 자신의 꿈을 키우고 그걸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거란다. 너도 니 마음속에 꿈을 절대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렴. 이 선생님이 힘 닿는데 까지 도와줄께”라고 하시며 그날 밤 따뜻한 이불안에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예전에 엄마가 해주셨듯이 그렇게 절 재워주시더군요.

그 날 이후로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고 완고하신 아버지를 찾아가 여러번 설득을 시키셨고 그 노력 덕에 전 시내에 있는 영암여고에 진학할 수 있었어요.




제게 꿈과 희망을 선물해 주신 우리 선생님.

물론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어서 참고서, 학용품 하나 살돈도 넉넉하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담임선생님께서 저를 학교로 부르셔서 “은혜야. 이번 기말고사 참 잘 봤다며? 소문이 여기까지 들리더구나. 아주 잘했어. 그리고 이건 과목별 참고서하고 학용품이야. 앞으로 책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렴”라고 말씀하시며 언제나 처럼 볼을 쓰다듬어 주시며 격려를 해주셨어요.

전 그런 선생님의 한없는 사랑에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그래 우리 선생님이 이렇게 나를 믿고 힘을 주시는데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해”라고 스스로를 다그쳤고 그 결과 고등학교 3년동안 전교에서 수석을 놓치지 않았어요.

그 덕에 저는 학력고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치루고 서울에 모대학 임상병리학과에 4년 장학생으로 합격을 했어요.

선생님이 되는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현재는 종합병원에서 몸이 아파서 고생하시는 환자분들을 돌보고 치료해드리는 임상병리사로서 보람된 삶을 살고 있답니다.


3년전 담임선생님은 교편을 놓으시고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경남 남해에서 요양을 하고 계시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너무나 마음이 아프더군요.

병원에 휴가를 내고 선생님을 찾아뵈었는데 병환으로 그 사이 몰라보게 쇠약해지신 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눈시울를 적시는 저에게 선생님은 언제나처럼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시더군요.

그리고 선생님은 “은혜야. 참 고맙다. 난 니가 참 자랑스러워. 그리고 너를 보면 예전에 어릴적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사실 마음이 아려왔단다. 나도 엄마 없는 가정에서 힘들게 공부했던 기억이 나서 너를 볼때면 마음속으로 참 많이 울었단다. 그러나 이렇게 니가 잘 성장해주고 보람된 일을 하고 있어서 정말 고맙고 행복하단다”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해주시더군요.

정작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저인데 한없이 따뜻한 사랑을 주시고 끝없이 정성을 쏟아주시던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제가 더욱 몸 둘 바를 모르겠더군요.

그 날 이후로 안부 전화를 드릴때면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렴. 이젠 몸이 많이 좋아지고 있으니 내 걱정 말고 너도 건강 꼭 챙기렴” 라고만 하시던 선생님께서 급작스럽게 작년 봄이 맘때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 세상이 다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과 슬픔을 느껴야만 했어요.


지금도 우리 중학교 동창생들은 매년 정기적으로 선생님의 묘소를 찾아뵙고 감사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어요.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의 꿈을 키우고 열심히 노력해서 그 꿈을 이루고, 남들을 위해서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선물해주셨던 사전 맨 앞장에 적어주시던 선생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해서 아직도 제 서재 책장에는 그 책이 꼽혀 있답니다.

‘사랑하는 선생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 보여주신 선생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제 마음속에 선생님은 선생님이시기 보다는 엄마처럼 자상하신 모습으로 더욱 많이 자리잡고 있어요.

앞으로도 저희 제자들은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세상의 빛과 소금과 같은 봉사하고 남을 위해 배려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할께요.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하고 또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