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부모님 같으셨던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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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누구에게나 가치를 두고 있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재물, 명예, 외모 등등 이래저래 따져본다면 그 수를 셀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이 가치를 두고 있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이 세상에 그 어떤 금,은, 보화와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크게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어릴적 깊은 감화와 소중한 추억 그리고 갚진 깨달음을 주셨던 초등학교 시절 나의 은사님에 대한 기억이 내가 소장하고 있는 것 중 가장 크게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 많은 고난을 겪으며 자라면서도 내가 지금껏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초등학교 시절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나의 은사님이 계셨기에 가능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선생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전혀 깨달을 수가 없었으나 나이가 30세를 넘어설 무렵부터 그때의 그 시절을 추억하노라면 선생님의 그 크신 은혜를 비로소 깨달을 수가 있었다. 내가 선생님과 인연을 맺게 된 때는 1988년 3월 겨울의 추위가 지나가고 따스한 봄기운이 맴돌아 봄의 옷을 입은 산천초목들이 사람들에게 해맑은 웃음을 선사하던 때였다.


초등학교 2학년 봄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하여 새 학년에 새 반으로 배정을 받고 새 교실로 갔을 때 2학년때 같은 반 친구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얼굴이 낯선 새로운 친구들이 모여 있었고 새로운 담임선생님이 어느분이실지 기대반, 걱정반으로 설레이고 있었다.

아침 9시 정각이 되어 수업종이 울렸고 새로운 선생님께서 교실로 들어오셨다.

머리는 긴 단발머리에 뿔테안경을 쓰신 제법 엄격해 보이는 인상을 소유하고 계신 선생님이셨다.

얼마있자 선생님께서는 출석부에 적혀있는 이름 순서대로 호명을 하셨고 학생들은 선생님께서 호명을 하실 때 마다 손을 들고 “네.”하며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칠판에 성함을 쓰셨다.

‘김인숙’선생님 이셨다. 그것이 선생님과 나의 첫 대면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선생님께 혼나지 않으려고 학생들 모두가 선생님 눈치보기에 여념이 없었던 듯 싶었다는 기억이 되새겨진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 나는 학급의 부반장이었다. 그래서 항상 나는 반장과 더불어 선생님 가까이에서 선생님을 보좌하는 학생으로서 타의모범이 되려고 노력을 많이 하였다. 그리고 나는 초등학교 3학년 초에는 장난끼가 좀 넘쳐서 수업시간이나 쉬는 시간이나 선생님께 장난을 많이 치곤 하였다.

선생님께 수업시간에 장난을 치던 나의 버릇은 날이 가면 갈수록 도에 지나칠 정도로 심해져만 갔다. 어느날은 내가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끝마다 농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김태욱, 너 이리로 나와.”하시더니 “너가 지금부터 수업해.”하시며 교실밖으로 나가버리셨다.

그리고는 1시간이 지나도 2시간이 지나도 3시간이 지나도 하루의 학교일과는 다 끝나가고 있는데 교실로 돌아오시지를 않으셨다.

나는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나의 행동을 돌아보게 되었고 점차점차 나의 마음은 잘못된 나의 행동으로 인해 뜨겁게 타들어만 갔다.

선생님께서 교실밖으로 나가시고 마지막 수업이 끝나기 20분전에 다시 돌아오셨다.

나는 선생님께 “선생님, 잘못했어요.”라고 했더니 “필요없어.”라고 말씀하신채 “태욱이는 오늘 끝나고 남아.”라고 하셨다.

선생님께서 하신 그 짧은 말씀을 듣고 나는 몹시 긴장을 하게 되었다. 학교수업이 끝나고 나는 교실에 남아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내 머리는 아비규환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을 다 돌려보내시고 선생님께서는 교실로 들어와 내게 말씀하셨다.


“오늘 너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반성은 많이 했어?”라고 물으셨다.

나는 그저 말없이 고개만 끄덕 거렸다. “선생님이 태욱이 미워서 그런 것 같아?”하고 물으셨다. 나는 그때부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선생님께서는 나를 안아주시고는 “앞으로 수업시간에는 장난하지마. 알았지?”라고 따뜻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 뒤로 나는 수업시간에는 선생님께 장난을 두 번 다시 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학교에서 한 학기에 한 번씩 품행이 단정하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표창장을 주는데 그 표창장을 내가 이제 더 이상 수업시간에 장난을 치지 않는 이유로 내게 주셨다.

표창장을 받은 게 중요한게 아니라 나의 나쁜 버릇을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고쳐주셨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었다.




선생님께서 그대로 나를 방치해 두셨다면 나는 아마도 그 시절 아무 어른에게나 거림낌없이 장난을 쳤음은 물론이었으려니와 가면 갈수록 장난의 수위는 도를 지나쳤을 것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항상 그때 나의 나쁜 버릇을 엄하게 꾸짖어 주신 선생님께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느날이었다. 점심시간에 점심을 먹고나면 1시간 동안의 휴식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에 나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점심을 먹고 친구들과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들과 장난을 치며 계단에서 뛰어놀다가 나는 계단에서 굴러 넘어지게 되었다. 내 얼굴에서는 이마가 찢어져 피가 홍건히 흐르고 있었다.

그때 아이들의 부름을 받고 다급히 내게로 오신 선생님께서는

“이게 어쩐일이야. 이게 어쩐일이야.” 하시며 나를 급히 업으시고는 뛰기 시작하셨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건너편에는 카톨릭의대부속 성가병원이라는 종합병원이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그 병원 응급실로 나를 업고 뛰어가셨고 나는 그 곳에서 봉합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울며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나의 손을 꼭 붙잡으시며 “됐어. 됐어. 조금만 참아.”하시며 두려움에 떨고있는 나의 마음을 진정시키시려 무던히 애를 쓰고 계셨다.


의사선생님께서는 “너 어떻게 넘어졌길래 이렇게 됐냐? 희미하게 머리뼈가 다 보인다.”하셨다.

그 소리를 들은 나는 더욱 소리높여 울기 시작했다.

선생님께서는 “이제 다 됐다. 잘 참았어.” 하시고 봉합수술이 끝났음을 알리시며 내 마음을 달래고 계셨다.

그때 당시 나는 정말인지 나를 달래시는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아늑함이 우리 어머니가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의 다정다감함이 강하게 느껴지게 되었다. 치료비 또한 선생님께서 내주셨다. 나의 어머니와도 같은 선생님의 지극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위험천만 했던 상황에서 나는 살아날 수 있었다. 초등학교때 있었던 여러 가지 추억들이 있지만 지금도 그때의 기억만큼은 생생하게 내 머릿속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금도 항상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다칠 수도 있는 상황에서는 그때의 그 기억이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곤 한다. 그야말로 스승의 은혜는 하늘과도 같다는 말이 나는 그 누구보다 더 뼛속깊이 각인이 되는 오늘을 살고 있다.


내가 2살이 되던해에 아버지께서는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 하시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홀어머니 밑에서 외동아들로 자라오게 되었다.

1988년 9월, 여름방학이 끝나고 초등학교 3학년 2학기가 막 시작됐을 무렵이었다.

그 당시 학교에는 선생님께 전화가 걸려오면 교무실 직원이 교실에 있는 인터폰을 통해서 알려 오곤 했다. 어느날 수업이 한창 진행중인데 교무실에서 인터폰이 걸려왔다. 선생님께서는 인터폰을 받으시고는 수업을 중단하시고 급히 교무실로 달려가셨다.

느껴지는 분위기가 왠지 다급하고 심각한 전화 같았다.

15분이 흘렀을까? 선생님께서는 돌아오셔서 수업을 재게하셨고, 수업이 끝난 후 선생님께서는 내게 말씀하셨다.

“태욱이는 오늘 끝나고 남아.”그 날은 수업이 4교시밖에 없는 수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수업이 끝나고 교실에 남아있었고, 같은 반 아이들을 하교시키고 오신 선생님께서는 내게 다가와 말씀하셨다.

내 두 손을 꼭 잡으시고는 “태욱아, 선생님 말 잘 들어. 아까 태욱이 외삼촌께서 전화하셨는데 태욱이 어머니가 오늘 돌아가셨다.”

“네? 엄마가 돌아가셨다구요? 왜요?”

“어머니께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돌아가셨단다. 이따가 선생님하고 같이 병원으로 가자.”하시며 말씀하셨다.

평소 심장질환을 앓고 계셨던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것 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일을 모두 마치시고 나를 어머니께서 계시는 병원으로 데리고 가셨다. 어머니께서 계신 곳은 학교에서 그다지 멀지가 않았다.

서울 수유동에 있는 준종합병원 응급실에서 어머니께서는 싸늘한 시신이 되어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어머니를 보는 순간 오열을 하기 시작했고 그런 나를 끌어안으시고 선생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시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은 집안에 친척도 가족도 있었을지 모르나 나는 고작 외삼촌 한 분 뿐이었다. 외동아들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나였다.

3일장을 지내지도 못하고 어머니의 시신을 외삼촌과 함께 수습하여 경기도 벽제 화장장에서 어머니를 화장하고 유골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장안사라는 사찰이 있는 지금의 일산추모공원에 모시게 되었다. 그 뒤로 나는 외삼촌의 집에 기거하게 되었다.

나는 학교수업이 끝날때면 집으로 돌아가도 볼 수 없게 되어버린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에 항상 학교화장실에 홀로 남아 울기가 일수였다.

언젠가 한 번은 화장실 안에서 울고 나오는데 학교수업이 끝나면 화장실에서 울고 나오는 사실을 아이들을 통해 아셨는지 선생님께서는 화장실 밖에서 기다리고 계시다가 내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시며 말씀하셨다.


“태욱아! 선생님 좀 봐봐. 이제는 울지마. 너가 울어도 앞으로 너 응석받아줄 사람 한 사람도 없어.

엄마는 쉬고 싶어 하셔. 이제 엄마 하늘나라로 보내드리자. 태욱이도 선생님처럼 지금부터는 어른되는거야. 알았지?” 하시며 말씀하셨다.

그 이후로 선생님께서는 내게 상당히 엄격해지셨다.

수업시간에 내가 다른 친구와 떠들면 다른 친구는 혼내지 않으시고 유독 나에게만 심하게 혼을 내셨고 때로는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시던 매로 나를 매몰차게 치시기도 하셨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학교수업이 다 끝나도 다른 아이들은 집으로 돌려보내셔도 나 하나 만큼은 홀로 남겨두고 공부를 시키셨다.

학교수업이 보통 오후 2시이전에는 모두 끝났지만 나는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끝이났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항상 내게 따로 숙제를 내주셨다.


처음에는 늦게 끝나는 학교수업으로 인해 너무 힘들어 ‘선생님께서는 왜 나한테만 저러실까?’하는 불만 가득한 생각으로 인해 괴롭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적응이 되어 그런 불만과 탄식들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초등학교 3학년 과정이 끝날때까지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나를 이끄셨다. 그 덕택에 나는 매일 하루에 일정시간동안 공부를 하는 습관이 몸에 베이기 시작했고 나는 그 습관을 나의 학창시절이 끝날때까지 버리지 않았다.

그 습관은 내가 자란 가정환경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내 성적이 상위권에 유지될 수 있도록 한 구심점 이기도 했으며 훗날 명문대에 합격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기도 했다. 선생님께서는 비록 내 옆에 계시지 않았지만 그런 습관으로 말미암아 선생님의 자취는 항상 내 모습속에 남아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과정 막바지로 접어들었던 1989년 2월 봄방학을 하기전이었다.

생님께서는 어느날 내게 자그마한 선물을 건내셨다.

“태욱아, 이거 집에가서 뜯어봐. 너가 전에 그랬지? 앞으로 선생님 안계시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하냐고?

이거 뜯어보면 이 안에 있는 물건에 새겨진 문구가 있을거야. 선생님 생각날 때는 항상 그거 읽어.”하시며 말씀하셨다.

집에 와서 선생님께서 주신 선물을 뜯어 보았다. 뜯어보니 다름 아닌 책받침대였다. 책받침대에는 커다랗게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책을 가까이 함은 스승을 내 곁에 모셔둠과 같은 것입니다.’라는 문구였다.




그것이 내게는 이른바 항상 책을 가까이 하라는 선생님의 초등학교 3학년 전과정에 걸친 마지막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색이 변색되고 녹이 슬어 많이 낡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책받침대를 갖고 있다. 흔들릴수도 있었던 나를 바로 잡아주시고 남에게 부끄럽지 않고 꿋꿋하게 자랄수 있도록 해주신 원동력이셨던 선생님의 분신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 책받침대를 버릴 수가 없었다.


선생님을 뵙게 되면 눈물이 나올 것 같지만 내 부모님과도 같으셨던 선생님을 부르며 지금 이 순간 선생님 품에 안기고 싶다.

그리고 아주 잠시만이라도 엄마품에 안긴 어린아이와도 같이 해맑게 웃으며 초등학교 시절로의 동심에 빠져 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