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선생님이라는 길을 걷게 이끌어주신 저의 은사님, 이소연 선생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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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오늘 선생님 뵈러 갈게요!!!!”,“ 지환이 학교 일찍 끝나는 날?”,“넹! 학부모 총회 한다고 집에 4교시에 가래요!!!”

선생님. 오늘 아침에도, 종종 그래왔듯이, 지환이에게 문자가 왔습니다.

선생님. 지환이는 제가 재작년에 중학교 2학년 담임을 맡았던 아이입니다. 이 아이는 삼학년으로 진급을 하고, 졸업을 한 후에도 설날과 추석, 크리스마스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날, 고마운 사람에게 안부를 돌리는 날, 또는 학부모총회, 시험기간과 같이 일찍 끝나는 날에 어김없이 감사와 사랑의 문자를 보내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벅찬 감동과 저를 잊지 않고 연락을 해주는 이 아이에게 고마움과 교사로서의 행복함을 느낍니다.

오늘은 선생님께 이 아이와 1년을 겪으며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선생님, 개강식 첫날 담임이 호명되던 그 순간 지환이가 그 큰 목소리로 “젊은 여자선생님이다!”라며 신나서 소리를 질렀던 기억이 납니다.

격하게 저를 환영해주는 그 아이가 사랑스러웠습니다.

지환이는 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딱 일주일을 모범생으로 생활하며 저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주 월요일부터 지환이는 다른 선생님들이 말씀하시는 소위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3교시가 되어서야 학교에 느긋하게 나타나는가 하면, 점심 먹고 말도 없이 집에 가버리곤 했습니다. 배가 아프다며 조퇴를 시켜줄 때까지 징징거리곤 하여 난감한 순간이 잦아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를 보며 선생님이 참 좋다는 그 아이를 미워할 수 없었습니다.


5월 즈음이 지나자 아이는 학교를 말도 없이 무단으로 안 오기 시작했고, 지환이에게 매일 아침 학교에 오라고 전화하는 일상이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제 전화를 처음에는 잘 받으며 곧 오겠다고 했지만 결국 수업이 끝 날 때까지 오지 않기 일 수였고 나중에는 제가 하는 전화도 피하곤 했습니다. 그러더니, 경찰서에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전자 담배 가게를 전부 털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다음 주에는 지환이가 친구들과 밤에 치킨집 오토바이를 훔쳐 타고 밤새 돌아다니다 기름이 떨어져 아무데나 버렸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친구들과 무리를 지어 옆 학교 아이를 산에서 다섯 시간 동안 무릎을 꿇려놓고 벌을 줘서 피해자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오셔 분노로 부들부들 떠신 날도 있었습니다.


선생님. 전 그럴 때마다 저는 아이가 지은 잘못에 죄송하다고 제가 지도를 잘 하지 못해서 일어난 불찰이라고 경찰서에, 피해자 어머니께 사과를 드렸습니다. 처음에는 기가 막혔습니다. 제가 살면서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기사에서 접했던 일들이 저에게 매일매일 일어났습니다.

경찰에 불려가고, 검사에게 학생 정보를 공문서로 보내며, 학교폭력자치회의에서 담임교사로 참석하여 사건 경위를 말하고, 아이를 변호하면서도 지쳐갔습니다.

겉으로는 그래도 아이가 사랑이 부족해서 그렇다. 조금 더 지도를 하겠으니 용서해 달라. 착한 아이라며 감싸주었지만 사실 제 마음은 지옥 같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어떻게 저럴 수 있나. 내가 아직 서툰 3년차 교사라 아이가 제 말을 듣지 않는가.

왜 하필이면 이 아이가 우리 반인가, 나는 교사로서 자질이 부족한가. 라며 스스로를 탓하는 날이 늘어갔습니다.

참 슬펐습니다. 선생님. 그럴 때 저는 선생님께 전화해서 안부를 여쭤봤습니다. 아주 행복한 목소리로요. 잘 지내고 계신지.

선생님이 계신, 제 모교 학생들은 어떠한지요.하면서 말이지요.


지환이의 어머님은 남편과 헤어져 혼자 보험 일을 하시며 지환이를 포함한 네 남매를 꿋꿋이 기르고 계셨습니다.

지환이가 청춘의 열병을 앓으며 방황하는 모습에 어머니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학교에 오셔서 제 앞에서 그렇게 우셨습니다. 눈이 새빨개지실 때까지 한참을 울고 계실 때 저도 안절부절 못하며 어떤 말을 해드려야 할지 몰랐습니다. 한참을 우시고 난 후 어머니께서는 이 힘든 시간이 지나가면 꼭 저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점심 한 끼를 대접하고 싶으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저는 어머님의 손을 잡아드리며 제가 더 열심히 아이를 잡아 보겠다고, 아이가 바른 길로 돌아오면 저, 어머님, 지환이 꼭 셋이 맛있는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엇나가는 지환이를 어머니와 교사인 제가 붙잡으려고 노력해 보아도 오히려 점점 더 나빠지는 아이의 모습에 저의 교사로서의 사명감이 서서히 스러져갔습니다.


8월말쯤 방학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날.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통화를 하면서 저는 절망스러워서 주저 앉았습니다.

지환이와 친구들이 학교 뒷산에서 방학동안 라카를 200봉지 이상 불었다고, 뒷산이 라카통과 봉지로 난장판이 되었다고, 주민 신고가 들어왔다구요. 모든 게 무너졌습니다.

그 아이가 더 이상 우리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됨과 동시에. 제 마음도요. 학생부에서 아이를 대안학교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는 제 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그렇게 제가 붙잡으려고 노력해도 더 엇나가던 지환이에 대한 원망으로 밤새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선생님과 함께했던 제 고등학교 시절이 불현듯 생각났습니다.


선생님 기억하시는지요. 입학식 첫날, 선생님께서 우리 반 아이들의 중학교 성적표와 고등학교 입시 성적을 하나하나 비교해 보시면서 학생들의 얼굴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때 제 중학교 성적표를 들여다보시며 의아해하시던 선생님의 안색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소위 특수목적고라고 불리는 그 학교. 제 중학교 내신 성적은 같이 입학했던 동기들에 비해 한참 많이 모자랐었지요.

입학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제가 그 학교에 지원했던 내막을 선생님께 말씀드렸었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1~2학년 전교 200등 내외를 하던 제가 연예인 sechs kies를 광적으로 좋아하면서 방송국에 더 자주 가고자 방송국 근처에 있는 저의 모교에 가려고 중학교 3학년 때 하루에 4시간씩 자면서 입시 시험을 준비한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sechs kies가 독일어로 여섯 개의 수정이라는 의미를 지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생님이 담임을 맡으신 모교 독일어과에 커트라인 점수로 합격했지요.


그러나 그 때부터 제 인생은 삐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대학을 가려는 목표로 중학교부터 공부습관을 들인 친구들과 연예인을 한 번 더 보려고 학교에 입학한 저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친구들 사이에 있었지만 언제나 홀로 섬 안에 갇힌 기분이었습니다. 점점 더 학교 가기 싫어서 우는 날이 많아졌고, 공부도 손에 잡히지 않아 수업시간 내내 잠만 잤습니다. 성실하고 열정적인 학생들을 가르치시며 그들이 좋은 대학을 진학했던 결과를 보시던 선생님께서 형편없이 행동하는 저를 보실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지, 걱정이 되셨을지 지금에야 조금 짐작이 갑니다. 그래도 내색한번 안하시며 언제나 저에게 따뜻하게 조언해 주셨던 것이 새삼 너무나 고맙습니다.

그해 어느 가을날, 친구들과 대화는 단절되고, 학습의욕은 이미 없어져버려 무기력해 지구상에서 없어지고 싶었던 그 어느 날, 저는 2교시가 좀 지나 더 이상 수업에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그냥 학교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정확히 누구신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수업을 하시던 어떤 선생님께서 너무나 황당한 얼굴로 저를 말리지도 못하고 쳐다보셨던 것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리고 학교 밖을 무작정 걸었습니다. 나는 이 학교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퇴하고 싶다. 살고 싶지 않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길거리를 정처 없이 헤맨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맥도날드 앞에서 재수 좋게 5천원을 주웠습니다.

그날따라 몸이 아프다고 늦게 등교를 하던 유일한 같은 반 친구 다정이에게 그 시간쯤 연락이 왔습니다. 둘이 햄버거를 사먹고 다정이가 절 다독여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학교에 꾸역꾸역 돌아왔습니다.


그날 수업을 마치고, 혼날까 조마조마하던 저를 선생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왜 그랬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나중에 말씀하시길,

표정을 보고 이미 알고 계셨다고 하셨지요. 내가 너무 외로워 보였다고. “힘들지.” 하시며 선생님은 제 손을 잡으셨습니다.

어디선가 선물로 들어왔다던 꿀떡을 챙겨주시며 “선임이는 손이 참 차네. 손이 찬 사람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래. 선생님이 그동안 선임이를 봤는데, 선임이는 마음이 여리고, 상처도 참 잘 받는 착한 사람 같아. 그래서 말인데, 선임이가 선생님이 되어 선임이처럼 마음이 아픈 아이들을 어루만져 주는 건 어떨까.” 그날 선생님 앞에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그동안 힘들었던 순간들이 눈물이 되어 그렇게. 그렇게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중학교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지환이가 대안학교로 간지 일주일, 저는 지환이네 대안학교 새 담임선생님을 찾았습니다.

그 아이가 사고를 쳤지만, 심성이 따뜻하고 워낙 교사를 좋아하는 아이라 분명 다시 바른 길에 들어설 것이라고, 한 학기만 잘 맡아달라고 부탁에 부탁을 거듭하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그 학교에 왔다는 소문이 지환이에게 10분도 안 되어 전해졌나봅니다. 제가 새 담임선생님과 이야기를 마치자 아이가 저에게 쭈뼛거리며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여기 왜 왔어요?”. 반가움과 미안함이 밀려와 목 밑까지 뜨거운 것이 차올랐는데 꾹 참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네 담임이니까 잠시만 맡아달라고 부탁하러 왔지! 잘하고 있어!” 그러고 한 학기가 지났습니다.

아이는 신기하게도 한 학기를 대안학교에서 잘 지내고 바른 생활을 인정받아 원적교인 우리학교로 돌아왔습니다. 여전히 공부를 잘 하진 못했지만, 지각하지 않고 성실하게 일년 을 더 지내고 그렇게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지환이의 졸업식이 가까워진 어느 날 차를 끌고 출근하던 중 걸어가던 지환이가 보여 옆자리에 태웠습니다.

그러면서 지환이 한 마디에 저는 가슴이 뻥 뚫리며 선생님이 저에게 하셨던 말, 그리고 그 때 선생님의 마음이 완전하게 이해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선생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마음이 깊어지고 깊어졌습니다. “선생님. 저 선생님 같은 체육선생님이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