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내 마음의 영원한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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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의 아버지는 아름다운 금강산 줄기 양구가 고향으로 6·25 때 북한 인민군으로 참전했었지만 공산당이 지긋지긋하게 싫어 반공포로 석방 때 자원하여 자유 대한의 품에 안기셨다.

전쟁 후 고향과 가까운 강원도에 정착했지만 배운 것이라고는 농사일밖에 없어 소작농으로 보릿고개를 넘으며 어렵게 살아오셨다.

그러던 ‘76년 초 강원도 홍천 두메산골에서 난산으로 병원에도 못가보고 어머니가 넷째 아기와 함께 저 세상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이 엄청난 슬픔을 술로 달래시더니 설상가상으로 몇 달 뒤 급성 후두암으로 세상을 또 하직하셨다. 삼남매만 남은 우리는 살길이 막막하였다. 언니 오빠는 봉제공장으로 떠나고, 겨우 아홉 살 어린 나는 어딘지도 모를 깊은 산속, 암자로 이웃집 아저씨의 손에 억지로 이끌려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나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날마다 어머니 얼굴이 사무치게 보고 싶고 인자하셨던 아버지의 한숨 소리가 내 가슴에, 울부짖던 오빠의 통곡이 두 귀에 매일 생생하게 들려왔다. 암자의 스님은 밤낮으로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애쓰며, “부처님의 자비하신 은덕으로 이곳까지 왔으니 아무 생각 말고 우리와 함께 살자.”며 은근히 동자승의 길로 나를 회유 하셨다. 아무리 스님이 잘 해 주셔도 내 슬픔은 깊어갔고 적막한 깊은 산속에 홀로 남은 나는 낙심과 체념으로 악몽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김학두 선생님과의 첫 만남

노란 개나리꽃이 방긋 웃음을 머금던 어느 봄 날, 꿈에도 그리던 언니와 낯선 신사분이 갑자기 나를 찾아왔다. 언니를 본 순간 너무나 반가움에 왈칵 뜨거운 눈물이 앞을 가리었고 끝없는 나의 오열은 원통골 골짜기에 구슬피 핏빛으로 메아리쳐 갔다.

“명숙아 너 데리러왔어. 울음 그만 그쳐”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꿈에도 그리던 언니의 볼을 꼬집고 또 다른 손으로 내 볼을 꽉 꼬집었다. 꿈이 아니었다. 언니는 두 볼에 눈물을 흘리며,

“그런데 명숙아! 어떻게 하지? 언니는 아직 너와 함께는 살 수가 없어. 여기 이 분은 너의 새 담임선생님이야. 네 사정을 들으시고 몇 년이라도 너를 보살펴 주시겠다고 쾌히 승낙 하셨으니 당분간 선생님 댁에 가 있을래? 언니는 네가 꼭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언니에게 가까이 갈 수 있다는 마음에서 따라나섰다. 담임선생님은 결혼한 지 2년 된 신혼으로 학교 관사의 방 한 칸에서 사모님과 갓 태어난 아기와 함께 세 식구가 오순도순 살고 계셨다.


어린 나를 보듬고 일깨워 주시고

선생님과 사모님은 철 따라 새 옷도 사주시고 예쁜 학용품도 사주시고 공부도 열심히 가르쳐 주셨다.

친 자녀처럼 대하여 주시는 데도 나는 그 고마움도 모르고 철없이 선생님과 사모님 속만 수 없이 썩혔다.

어느 날 김장밭을 만드시느라 바쁜 선생님과 사모님이 부탁한 아기를 업어 주는 것이 싫어 아기를 잔디밭에 내려놓고 뛰어 놀다보니 아기가 강아지똥을 집어 먹은 사건이 있었다. 그래도 야단을 치지 않으시던 내외분, 차라리 실컷 야단치고 욕이라도 해 주셨더라면 내 맘이 훨씬 더 편했을 텐데.....

방 한 칸에 딸린 다락방이 작고 무서워 잠을 못자겠다고 생떼를 썼고,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 때 만 되면 미치도록 어머니 아버지가 그립고 보고 싶어 실성한 듯 먼저 살던 고향집까지 3km를 수없이 달려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다 쓰러져가는, 불도 없는 고향집 댓돌에 앉아 목 놓아 울고 있는 나를 몇 시간이고 달래어 주셨다. 자전거에 태워 꼬불꼬불 시골길로 돌아올 때는 자꾸만 도망가고 싶은 내가 스스로 밉고 선생님께 미안하여 고개를 푹 숙이고 소리 없이 울었다. 어느 때인가는 자전거 뒷좌석에 앉아 선생님 허리를 꼭 붙잡고 있는데 시큰한 선생님의 땀 냄새가 아버지의 냄새와 똑같았다.

“선생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될까?. 아! 아버지!”




어느 날 내가 살던 집을 향해 정신없이 뛰어가고 있었다. 붉게 물들었던 노을도 어느덧 잿빛으로 변하여 사방이 캄캄해져 무서움이 엄습해왔다.

‘다시 관사로 돌아갈까?’

오늘 친구들에게 왕따를 심하게 당해 참았던 슬픔이 폭발할 직전이었다.

“엄마 아빠 없는 고아 주제에 선생님 댁에 산다고 재냐? 선생님은 명숙이 너만 사랑하고.”

시기 질투하고 왕따 시키며 때린 재희가 너무 미워 고향집 벽에 걸린 부모님 사진이라도 보며 원 없이 실컷 울고 고해바칠 참이었다.

출렁다리를 건너 산모퉁이를 막 돌아가는데 웬 시커먼 사람이 불쑥 나타나 내 손목을 확 잡아당기고 입을 콱 틀어막았다.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힘이었다. 실랑이를 치며 한참을 억새밭으로 질질 끌려가는데,

“게 누구냐! 당장 그 손 못 놔?”

반공웅변 홍천군 대표 선수인 선생님의 뇌성벽력 같은 목소리가 용추골 골짜기에 화산 폭발 소리처럼 울렸다.

검은 사나이는 걸음아 나살려라 약바위 험한 길 쪽으로 도망갔다.

“휴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다시는 선생님 걱정 끼치는 일 없게 하겠다고 맹세하였다.

‘낮에 일을 알고계신 선생님이 내가 도망간 것을 알고 급히 뒤쫓아 오시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누굴까? 동네 여자 속옷만 훔쳐 간다는 그 변태? 그래 갈골 00 언니한테 성폭행 당했다고 남자가 치사하게 파출소에 고소했다는 그 변태가 맞아’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 뒤 땅거미가 진 뒤에 다시는 밖에 나가지 않았다. 고향집에도 가지 않았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초겨울 어느 날 교정에 있는 고목에 수줍게 숨어 예쁘고 소담스레 피어난 느타리버섯을 보았다.

‘버섯을 따서 칭찬을 들어야지’

나무에 올라갔다. 버섯이 손에 닿는 순간, 발을 그만 헛디뎌 허공중에서 버둥대고 있었다.

“아이고! 나 살려줘요”

붙잡고 있던 작은 나뭇가지가 결국 부러져 떨어지는 절대 절명의 순간, 선생님이 어디선가 달려 오셔서 나를 온 몸으로 받아 위험으로부터 구해주셨다. 선생님 품이 너무나 따뜻했다. 이상한 행복감으로 나의 가슴이 마구 뛰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때부터 나는 평소 엄한 선생님에 대한 무서움도 거부감도 모두 사랑스럽고 존경스런 마음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선생님은 참으로 교육에 열정이 많은 분이셨다. 크리스마스카드와 연하장 수 백점을 그리고 쓰고 장식해서 읍내 버스 터미널에서 가두판매를 하여 불우한 제자들의 입학금을 내주셨다.

또 문화재 정비 사업으로 마을에 ‘이소 효자정문’을 세울 때는 40여일을 하루 네 시간씩 지붕에 거꾸로 매달려 근육통, 담이 들으면서도 단청을 보수 없이 해준 의로운 분이셨다.

또 그 해 추운 겨울에는 싸리비 200개를 손수 만들어, 차도 못 다니는 울퉁불퉁한 시골길 총32km를 손바닥에 동전만한 물집이 수 없이 생기면서도 100kg 손수레를 끌고 읍내에 가서 팔았고, 가을 우량 채소 씨앗을 세 마을에 보급한 수익금으로 우리 반 모두 서울 여행을 보내주셨다.

몇 년 뒤엔 사모님이 받은 ‘교육감 감사장 포상금’으로 돼지 두 마리를 사서 직접 길러 담임 반 어린이들은 물론 서울 구경 못한 학부형들을 2회나 여행 보내 주신 보기 드문 상록수 같은 분이셨다.


헤어짐 그리고 또 다른 만남

몇 년 후 우리 삼남매는 어렵지만 서울에서 다함께 모여 살게 되었다. 나에게 서울의 생활은 생소했지만 시골에 비해 마냥 행복했다.

3년 후 언니가 결혼하게 되자 우리가족은 또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오빠의 짐을 덜어주고 나도 새로운 삶을 살아야 되겠기에 어린 나이에 독립을 하였다. 고학하며 방통대를 졸업하고 지금의 남편과 일찍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근면한 남편은 열심히 일했고 나도 두 아이를 키우며 가정에 충실했다. 아이들도 튼튼히 잘 커서 가정의 행복이 ‘이런 것이로구나!’ 깨닫게 되었다.

행복한 생활 속에 파묻히다보니, 선생님 소식은 춘천교대부속초등학교에서 사표를 내시고 먼 곳으로 떠나셨다는 소문을 끝으로 알 길이 없었다.


2007년 3월 23일 “목사 선생님 ‘남강교육대상’을 수상하다.”

대문짝 만 한 신문 기사가 선생님 사진과 함께 눈에 띄었다. 그렇게 애타게 찾아도 알 수 없던 선생님의 연락처를 드디어 알게 되었다. 강원도가 아닌 같은 경상북도 그 것도 지척에 함께 살고 계신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망설임 없이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제가 아이들이 어려 못 가니 사모님과 함께 울진으로 놀러 오세요.”

토요일, 드디어 선생님과 사모님을 뵙게 되었다. 30년 만에 처음 뵙게 된 선생님의 흰 머리는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다. 만감이 교차되고 반가움 때문인지, 감사함 때문인지 선생님의 두 손을 붙잡고 어린 아이처럼 한없이 목 놓아 울었다. 나를 보시자마자 하시는 선생님의 첫 목소리는 여전히 우렁찼다.

“한명숙, 너 참 대단해! 그 때의 쬐끔했던 꼬마가 이젠 두 아이의 엄마가 됐네.”

반갑고 건강해 보이셔서 감사하지만, 나는 그 동안 못 찾아뵈어 죄송할 뿐이었다. 사정을 다 들으신 선생님은,

“참 반갑다. 이렇게 훌륭한 가정주부가 되었으니 넌 장차 꼭 큰 복을 받게 될 꺼다. 그리고 예쁘고 귀여운 아이들을 낳았으니 부모가 매일 축복해 줘야 해 알았지?”

“살다보면 힘든 일 괴롭고 포기하고 싶은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절대 포기하지 말고 힘내서 열심히 살아.”

헤어질 때 하신 선생님의 말씀은, 처칠 수상의 좌우명인데 30년 전에도 늘 선생님이 힘주어 하신 말씀이라 두고두고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항상 내 마음의 큰 울림으로 새겨놓았다.

선생님은 2007년 당시에 교사와 목회, 두 가지 일을 8년째 겸하고 계셨다. 목회일은 봉사로 하셨기에 교육재단, 교육청에서도 인정하셨다.

학교도 교회일도 하루 4시간도 잠 안 주무시고 열심히 하시니, 정말 수상이 어려운 전국교육대상도 받으시고 목회도 성공적으로 하셔서 개척한지 2년 만에 500평 대지에 130평 2층 교회를 세우시고 난치병 환자를 위해 기도하고 어렵고 힘든 이웃을 돕기 위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생활을 하고 계셨다.




또 다시 삶의 시련 속에서

전라도로 생활터전을 옮긴 후 그토록 씩씩하고 건강하게 일하던 남편이 신경성 관절염을 얻어 갖은 치료를 다 해 보았지만 결국 직장을 그만 두게 되었다. 청천벽력과 같은 위기가 평화롭던 우리 가정에 쓰나미 처럼 몰려왔다. ‘아!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눈앞이 캄캄해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경제적 압박도 날이 갈수록 가중 되었다. 그 때 문득 선생님이 다시 생각났다.

‘선생님께도 자문을 구하자. 그래 내 삶에 포기는 없다.’

선생님은 칠십이 다 되셨는데도 ‘전국 민족복음화 운동본부 부흥사’로, 목회자로, 요즈음은 43년 교직생활이 그리워 포항남부초등학교에

안전지킴이 선생님’ 일도 자원해 하고 계셔서 매우 바쁘셨다.

하지만 사정을 들으신 후 소망과 희망의 메세지를 끊임없이 계속 전화로 전해 주셨다.

“명숙아! 천하 범사에 때가 있으니 이젠 네가 너희 가정을 이끌 때란다.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갖고 네가 가장 자신 있는 것으로 승부를 걸어 보려무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사실을 반드시 믿으며 말이야. 화이팅!”

말씀을 들으니 용기가 나도 모르게 불길같이 솟아올랐다.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존경하는 선생님도 2010년도에 61세에 사립학교를 그만두고 공립 교사 특별임용고사에 도전,

합격하셨으니 나도 할 수 있어. 나는 내년이 돼야 지천명. 하늘의 도움을 믿고 최선을 다하자.’

공부 외엔 재주가 없는 나는 찬 물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여매고 그날부터 정말 열심히 공무원시험 준비를 했다. 나이 오십 엄마가 도전하기에는 너무나 힘들었다. 중도에 몇 번인가 포기하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투병하는 남편과 나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포기? 늦다고 생각할 때가 바로 도전 해 볼 제일 좋은 적기야. 한명숙! 너는 반드시 해낼 수 있어. 아자아자 명숙아 더 힘내 끝까지 화이팅 ! ”

선생님 말씀이 회초리가 되고 몽둥이가 되어 나의 나약한 생각을 마구 두드리고 부숴버렸다.

‘그래 난 할 수 있다.’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해 남들이 어렵다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차근차근 준비했다.


선생님의 은혜, 넓고 깊어라.
“여보 합격이야 합격!”

1년 6개월 후 우리 부부는 서로를 얼싸안고 엉엉 울었다. 그리고 맘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사가 울음과 함께 울컥 솟구쳐 올랐다.

“선생님! 포기하지 않도록 힘주시고 도와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실 아버지 어머니! 정말 감사해요.”

“여보 불편한 몸으로 도와 줘서 감사해요. 당신이 최고!”


‘합격은 오직 선생님 덕분예요. 나에게 마지막 준, 이 하늘의 기회를 천명으로 알고 선생님처럼 정직하고 청렴한 공무원 생활로 보답하겠습니다. 나라에 올바른 일꾼이 되고 가정에 기둥이 되어 선생님 은혜에 꼭 보답하는 명숙이가 되겠습니다.’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은 은인선생님께 소리 없는 다짐을 보냈다.

2017년 1월 2일 나이 오십에 신입 공무원이 되어 장흥군 대덕읍사무소로 출근하는 나를 내려다보는 하늘이 따사로운 햇살을 비추며 빙긋이 웃는다. 너무나 감사하다. 하늘도 응원을 해주는 이 날, 나는 모두에게 감사의 멘트를 날린다. 두 손을 높이 들고 한 바퀴 빙 돈후 양손을 모아 나팔을 만들고,


“힘내세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선생님들!

사랑이 충만한 선생님들이 계셨기에 우리나라 국민 모두 잘살고 있자나요.

언제나 내 마음의 영원한 오아시스 같은 김학두 선생님!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선생님의 은혜 진심으로 감사하며 사랑합니다!”